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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thought/From Book

코로나 19가 만든 세상: '고립의 시대'와 '공간의 미래'를 읽으며

  코로나 확진에 즈음하여 독서 중인 책들과 연결지어 생각해 보는 글.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작

  지난 2년 간의 코로나로 많은 것들이 변화되어졌다. 

  우한에서 의대를 다니던 내 친구의 말처럼 중국이 무기로 만들 바이러스 실험을 하다가 유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때가 기억이 난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음모론마냥 나도 그 친구의 말을 믿었고 중국에서 발표하는 터무니 없는 확진자 수를 보면서 사람들과 비웃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 인류를 괴롭혔던 세균과 바이러스 처럼 영겁이 될지도 모르는 인류의 역사 흐름 속에 짧게 지나가는 일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이러한 만남이 필연적이었을 것. '공간의 미래' 서문에 나오는 최재천 교수의 말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게 된 계기가 인간 문명의 발전에 의한 지구 온난화였다면 어쩌면 자기 파괴적인 결말이 되버릴 수도, 아니면 이마저도 견뎌내고 더욱 강해진 인류의 진화가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최재천 교수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박쥐 생태계와 인간의 생태계가 교차되게 되는 상황에서, 바이러스를 면역체계를 통해 죽이려는 인간과 달리 바이러스와 공존하는 전략을 취하는 박쥐에 의해 바이러스가 전염된 것이 코로나라고 설명한다.

 

  코로나가 바꾼 것, 아니 가속시킨 것

  코로나가 가장 변화시킨 것은 '공간'이다. 공간을 통해 인간은 관계가 정립되고 그러한 단위는 일반적으로 배타적이지만 그 그룹의 구성원들만큼은 서로를 지지해주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이 형성된다. 

  그리고 인간에게 공간은 권력을 상징하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력욕이 있고 그 권력에 의한 공간구조의 형성은 공동체나 유대감의 이유와 더불어 공동체 공간이 해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인간-인간의 상호작용을 대신할 거리들이 생겼다. 인공지능이나 로봇들은 이를 대표하고, 인간군상의 변주곡에 지쳐있는 사람들은 완벽한 기계를 택하게 된다. 

 

  '고립의 시대'에서는 인간문명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공통된 공간을 많이 만드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만큼 모여있는 세상을 흩어지게 한 코로나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제는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해 재택근무가 보편적이게 되었고, 우리가 싫어하는 회식도 점차 줄어들었다. 반면 개인의 시간은 더 커졌다.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세상에서 마스크 벗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점차 프라이빗한 개인의 공간에서의 삶이 익숙해짐에 따라 타인과의 접촉이 익숙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이를 이용한 '특정 산업'은 점차 커져갔다. 배달 음식이라고 하면 중국집, 치킨, 피자, 족발 정도 밖에 없었던 때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이제 너무나 다양한 메뉴가 배달이 된다. 배달비 하나 없던 세상에서 이제 배달비가 당연시되는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굳이 밖에 나가지 않더라도 밀키트를 이용하여 다양한 요리를 집에서 맛볼 수 있도록 음식 산업은 점차 변해갔다. 

  이러한 개인주의화, 즉 고립화 현상이 심화되는 '고립의 시대'에서는 '외로움 해결 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대리 친구'가 된다거나 우울증 등의 심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상담'산업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코로나가 만든 것이 아니다. 단지, 정보 또는 디지털 혁명이라 부르은 인간문명의 진화에 따라 자연적으로 생겨난 현상을 코로나가 더 가속화시킨 것일 뿐이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해준 것은 바로 그걸 가능하게 한 도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비대면화, 개인화, 파편화 등의 키워드를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다.

 

  코로나와 인간, 그리고 공동체

사람이란 정말 복잡한 존재이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안정을 원한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한국에서의 삶,
추운 겨울에는 조금이라도 따뜻한 날씨를 바라고, 무더운 여름에는 서늘한 날씨를 바란다.
조금이라도 한 쪽에 치우쳐져 있는 상태라면, 그 정반대를 추구한다.
무엇인가를 생산하다가도 곧 그것을 파괴한다. 프랙탈처럼 점차 복잡해져가면서도 곧 단순하게 정리한다.

 

사람은 뭐든지 편리한 것을 추구한다.

'문명의 이기', '과학기술의 발전의 이기'를 쫓는다.


그래서, 고립의 시대를 읽으면서 기술이 발전하고
그로 인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어색해지고
반대로 인간과 기계(로봇)의 상호작용이
향상된 것은
코로나 시대의 영향이 심화시켰지만
결국 그러한 인간관계를 바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픈플랜형 사무실을 예로 들며,
더 상호작용이 증가하고 업무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초기에는 기대했지만
오히려 반대로 직접 소통보다는
메일로 소통하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 처럼 말이다.
사람은 언제나 지금 놓여있는 반대를
추구하는 버릇이 있다.

애완동물, 애착인형을 뛰어넘은
애착로봇이 이제 이 시대의 외로움을
달래줄 것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글래스턴베리 뮤직 페스티벌'에서
공동체 의식의 복귀를 찾듯이
인간 대 인간의 모임을 다시 찾게 될 것이고,
시간이 걸릴 지라도 그러한 공간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책의 주장처럼
공동체 의식을 갖을 수 있는 지역의 공간들이
힘든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고 버티게끔 도와줘야 한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책에서는 정부와 기업들이 이를 위핸 책임감을 갖고 정책을 추진해야한다고 한다.)

 

한 편으로는 요즘 젊은 시대의 소통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그 공간을 같이 향유하고 나름의 주인의식을 갖도록 습관화하는 세심함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