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고 자란지역은 러시아였지만 성인으로서 시간을 보낸 발랴코프 일리야는 자신을 '한국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의한다. 핏줄, 민족을 우선시하는 단어인 한국인의 범주에는 속할 수 없지만 한국을 사랑하고 살고 싶은 마음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절반을 러시아에서, 절반을 한국에서 보낸 일종의 '경계인'과도 같다. 방송이나 본인의 SNS 등 여러 매체에서 접한 그는 관점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쓴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는 러시아인으로서 그가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여러 오해를 풀어낸 재밌는 책이었다.
러시아는 살면서 한 번 여행으로 가보긴 했었고 최근 전쟁을 벌인 '악마 같은 국가'라는 일종의 낙인을 찍힌 관심 받는 국가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도 늘 관심을 갖고 있긴 했지만, 러시아인이었던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이야기들은 흥미로웠다. 그 중 하나가 러시아인들은 무뚝뚝하다는 오해이다. 사실 나도 여행 중에 도움을 받을 때마다 말 걸기가 두려웠지만, 막상 손짓발짓으로 물어보면 잘 알려주던 '츤데레' 스타일의 러시아인에 대한 추억이 있었다. 일리야는 러시아인들의 웃음은 진심을 표현하는 그 자체이며, 사회생활 간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하는 상황이 우리나라에는 더러 있지만 그런 경우에 러시아인들은 무표정인 것이 일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할리우드 미소'를 좋아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웃는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만 웃는다는 것이다.
'웃음'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슬랩스틱과 같은 몸개그, 원초적인 개그를 좋아하는 편이다. 요새 들어 스탠드업 코미디에 대한 관심이 조금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 외국만큼은 아닌 것 같다. 반면, 러시아는 서구 지역처럼 말로 하는 농담을 좋아하고, 지인들끼리 만나면 '아녜크도트(Anecdote, 작은 일화)'를 주고 받으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즐긴다고 한다. 내용은 사회비판이라던지 장모-사위의 관계 등을 꼬집한 풍자가 주를 이룬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말장난 즐기는 문화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유럽이 되고 싶은, 닮고 싶었던 근대 러시아의 모습을 떠올려 볼 때 그런 유럽의 문화들이 자연스레 흘러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소련에서 러시아의 전환기 시절을 보낸 경험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지도자였던 고르바쵸프의 무능으로 인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한 급속도로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변화는 사회적으로 재앙에 가까웠고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십여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에서 러시아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부패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일리야는 밝힌다. 이로 인해 변혁기에 고통받던 러시아 국민들은 오히려 과거 소련 시절의 향수에 젖어 그와 유사한 형태의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다시금 이루어졌다. 푸틴이 원하는 '질서' 있는 러시아, 곧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할 수 있는 여건이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 같은 독재자를 아직도 추앙하고 수많은 악행보다는 성과 있는 지도자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능해졌다. '올리가르히'라는 공산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환되는 시기에 사회간접자본시설을 담당하는 국영 기업들의 권리를 독점하여 러시아의 경제를 주무르는 사람들이 등장하였지만 이들도 이제는 푸틴의 하수인이 되었거나 점차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발 음모론에서 볼 수 있듯 방사능 홍차를 먹여 푸틴의 러시아를 반대하는 세력이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러시아 재벌들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사실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그런 냄새(?)가 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의심하는 것이 아닐까.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남녀간의 역할 분담이다. 러시아에서는 가사와 육아는 어디까지나 여자가 해야할 일인 것을 당연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모든 사람이 일을 해야했던 소련 치하에서도 가사와 육아는 여자가 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여성 인권의 신장과 사회 진출로 인해 각자의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가사나 육아도 여성 뿐만이 아닌 남녀가 같이 분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변하고 있는 시점에서 북극곰처럼 바뀌지 않는 러시아의 남녀 역할 인식 또한 신기할 따름이다.
늘 유럽을 지향하지만 유럽 같지 않은 나라,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와는 가깝고 멀기도 한 러시아. 지금은 북한에 막혀 러시아와의 육로 교류가 없지만, 그 막혔던 교류가 해소되는 날 더욱 가까워지고 협력이 될 것이라고 서로 생각할 것이다. 에너지든 뭐든 러시아와 한국은 예전처럼 주고 받을 게 많은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같은 불안정한 시점에서는. 그런 점에서 반은 러시아, 반은 한국인의 정서가 흐르는 일리야의 글은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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